완벽주의
완벽주의가 심리학의 한 주제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나, 완벽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램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하나님처럼 완전한 자가 되고자 하는 바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완벽하다는 것은 개인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인 상태이며 촉구해야 할 미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결코 완벽해 질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완벽에 매달려 있는 완벽주의는 교만이며,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심리치료사 리처드 윈터(Richard Winter) 교수에 따르면 우리를 둘러싼 허다한 광고가 완벽에 대한 무의식적인 환상과 꿈을 자극하고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현재 모습과 소유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더 증가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완벽한 몸매, 완벽한 옷, 완벽한 가정, 완벽한 집, 완벽한 직장, 등 우리 삶에서 훌륭하고 멋진 것을 추구합니다. 특히 잡지나 TV광고에 나오는 세상의 많은 외적인 기준들이 우리를 힘겹게 합니다. 오직 똑똑하고 잘생긴 외모를 가진 사람들만이 인정받고 보상받는 세상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나 도덕적인 성품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외모나 간판 때문에 존경을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과 존경을 받기 위해 우리는 기를 쓰고 일류대학에 가기 원하며, 아름다워지기 위해 한국은 지금 성형 중입니다.
윈터 교수는 완벽주의를 건강한 완벽주의와 신경증적인 완벽주의로 나눕니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완벽주의는 보통 활력과 열정으로 가득하며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고 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부정적인 요인보다 성취욕구라는 긍정적인 요소에 동기부여가 됩니다. 그들은 노력 가운데서 진정한 기쁨을 느끼며 상황에 따라서 정확하지 못하고 좀 부족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이런 건강한 완벽주의는 장려하여야 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경증적이고 해로운 완벽주의는 비현실적인 높은 기준을 세우며, 이들이 생각하는 자기 가치는 스스로 세운 목표를 얼마나 성취하고 이루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실수에 대한 지나친 걱정, 끊임없는 자기비판,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흑백논리에 빠집니다. 우리의 자기 가치감이나 자존감이 그러한 높은 기준을 성취하는 것에 달려 있을 때 그 결과는 패배감뿐입니다. 그러므로 해로운 완벽주의는 우울, 불안, 지연행동, 거식증, 자살성향, 강박장애 등을 일으킵니다. 이런 신경증적인 완벽주의는 자신이 세우거나 사회가 부과하는 비현실적인 기준 앞에서 늘 시달리고 지쳐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높은 기준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며 관계가 깨어지곤 합니다.
일반적으로 완벽주의의 근원은 부분적으로는 타고나고 부분적으로는 학습을 통해 생겨난다고 합니다. 완벽주의는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기질적인 요소, 가족이 보여주는 기대와 선례, 문화적 압력, 오랜 세월에 걸친 수치스러운 경험이나 학대 등 복합적이고 다양한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지나친 기대를 품고 있는 완벽주의 부모는 관계를 맺거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종종 자녀들 또한 완벽주의자가 되도록 가르칩니다.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이 세운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자신을 비하하고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하는데 그런 실망과 비하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실상은 자신에 대한 높은 기대 때문이고 자신은 완전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밖에는 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며 이는 자기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는 사실 남보다 더 뛰어나려는 열망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유한하며 제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나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어떤 분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의 통치자가 되고자 하는 갈망, 혹은 우리가 반드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갈망, 즉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해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48). 일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 세상에서 완벽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실제로 완전함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윈터 교수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명령하실 때 사용하신 동사의 시제는 미래형으로 완전하다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며 지금 당장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능력이나 외모가 아니라 인격적인 성숙과 관련해서 완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진정한 완벽함이란 그리스도의 성품을 기르는 데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거절에 대한 두려움, 자기 중심성 또는 교만 때문에 탁월함을 추구한다면 성숙과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동원해 할 수 있는 최고가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 완전한 것일까요? 그 이면에는 이기적인 우리의 욕심이 도사리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떤 능력의 탁월함이 아닙니다.
그러면 완벽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불완전함으로 더불어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불완전함을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를 창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계시다면 문제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 심지어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정체성이 아니라 주어진 정체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며, 우리의 정체성을 아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완벽주의 이미지와 이상들 속에서 자신의 가장 깊은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문화의 압력에 저항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는 용기, 완벽에 미치지 못할 수 있는 용기, 내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불완전함을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완벽해질 수도 없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완벽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더 온전해 지기를 위해서 노력은 하되, 우리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는 그대로를 용납하며 인정하는 성숙함이 요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