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약 300년경에 애굽(이집트)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빌론 유수 이전부터 거주하던 유대인과 바빌론 유수 때 애굽으로 피난 간 유대인 등 약 12만 정도 유대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애굽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와 맞먹는 세계적인 도시로 문화와 패션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도 알렉산드리아에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더 이상 히브리어를 읽거나 쓸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어 아티카 방언인 '코이네'가 헬레니즘 세계 전체의 언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예배에서도 히브리어 성경을 사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때 70인역(LXX)이 준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당시 이집트의 왕조는 프톨레미 왕조였고 왕은 필라델포스였습니다. 그는 유대의 율법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수도 알렉산드리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서관이 있었는데 2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세계적인 도서관이었습니다(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여러 차례 화재로 파괴되었습니다). 필라델포스왕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히브리어 율법서를 그리스어인 헬라어로 번역하여 소장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는 정확한 율법 사본이 없었고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할 수 있는 율법학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유대의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율법에 정통한 학자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유대의 대제사장은 12지파에서 각각 6명씩 72명(혹은 70명)을 선발해서 알렉산드리아에 보내 모세오경부터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이 성경을 후대의 사람들은 셉투아진트(Septuagint, LXX, 70인역)라는 라틴어 칭호로 부르게 됩니다. 결국 구약성경 전체가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되어 헬라제국을 통해 성경의 세계화라는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칠십 인 역은 유대교의 초기 확산과 나중에 초기 기독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들을 포함하여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저서에서 칠십 인 역을 인용하거나 언급했습니다. 오늘날 칠십 인 역은 성서 본문의 역사와 그 전달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중요한 본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스라엘의 성전(제 1성전, 제 2성전) (0) | 2024.02.03 |
---|---|
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 (0) | 2024.01.28 |
회당 (Synagogue): 회당의 기능 및 성전과 회당의 차이점 (0) | 2024.01.14 |
고대 이스라엘 여성의 지위와 역할: 사회 및 종교 생활 (0) | 2023.12.08 |
고대 이스라엘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 가정 생활 (4) | 2023.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