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복잡해지고 스트레스가 많아지면서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명상에서 찾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즐겨하는 명상은 마음 챙김 명상입니다. 본 글에서는 마음 챙김 명상에 대해 기독교적 관점에서 살펴보려 합니다. 마음 챙김 명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본 저자의 글 ‘마음 챙김 명상의 개념과 특징’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https://pharosyoo.tistory.com/entry
마음 챙김 명상에 관한 과학적 연구들에 따르면 마음챙김명상이 다양한 육체적, 정신적 건강문제를 완화하고 심리적 기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마음챙김이 의심할 여지없이 긍정적인 신체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마음챙김을 통해 면역체계가 향상되고 스트레스반응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 챙김 명상을 통해 주의집중과 주의집중에 대한 자기조절, 인식 등 아주 중요한 능력을 계발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현재 일부 기독교인들도 마음챙김명상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거나 실제 마음챙김명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Kabat-Zinn 같은 학자는 마음 챙김은 상식에 기초하고 있고 반드시 영적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음 챙김 명상은 불교의 명상법에서 유래된 것으로 불교에서 주장하는 여러 사상, 특히 선불교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사상들은 기독교의 사상들과 배치되는 것들이 많으므로 불교의 명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마음 챙김 명상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마음 챙김 명상의 저변에 깔려 있는 가정이나 주장들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불교의 마음 챙김의 목적은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아(無我)에 대한 통찰을 기르는 것입니다. 마음 챙김을 통해서 자기 존중을 증진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self)의 무실체성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또 마음 챙김 명상에서는 마음이나 생각이 궁극적인 실재와 진리를 이해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생각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활동으로 보고 사고와 생각이 영적인 깨달음에 위험한 것으로 여깁니다. 마음을 포함해서 일시적인 이 세상은 실재가 아니고 변화(rising and falling)하는 것이고, 명상을 통해 이 변화를 초월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명상을 통해 명상가가 생각에 집착하지 않도록 훈련시켜 생각의 증인, 혹은 관찰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생각과 이성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한 수단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이성과 사고는 하나님의 성품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의 마음은 여러 인지, 정서, 의지 등의 체계들의 활동과 영적인 실체(entity)를 포함합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심장이며, 정서, 감정과 욕구, 지식, 생각과 의지가 있는 곳으로 인격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은 이성적 능력이 있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수단과 도구이자 정서적인 요소들을 포함한 인격으로서 하나님과의 교감이 일어나는 장소이고, 거하시는 곳입니다.
둘째, 불교는 자기(self)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을 믿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의 결과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고통도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의 결과 일어나는 것으로 여깁니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실체를 인생 자체로 보며, 그 고통의 근원이 마음에 있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인한 모든 내적인 경험들, 감정들과 생각들이라고 봅니다. 마음 챙김 명상이 생각을 분리하는 것을 도와주고 분리가 집착을 감소시키고 결국 깨달음과 자유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즉 분리의 결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무상, 무아의 세계를 유상, 유아의 관점으로 인식한 결과입니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통한 인식의 변화를 통해 고통을 없애려고 합니다.
인간에게 고통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 인간이 해결 능력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하나님이며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변화됩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의지로만 심리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또 다른 자기 중심성, 즉 죄의 뿌리인 교만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C. S. Lewis는 고통을 ‘특정한 종류의 감각’과 ‘육체적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당사자가 싫어하는 모든 경험’으로 구분하고, 후자의 경우가 ‘고난’, ‘고뇌’, ‘시련’, ‘역경’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80%는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생긴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고통이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나 기독교는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설명하며, 인간의 원죄의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경험하게 되는 결과 들 중 하나로 여깁니다.
그뿐 아니라 마음 챙김 명상에서 말하는 분리는 일시적인 마비나 거짓된 평안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분리의 결과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 평화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착이나 선한 욕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삶의 어떤 부분에는 집착을 가지기를 선택하는 것이 기독교 영적 성장의 일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과 정서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 불의에 대한 분노, 이기적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러한 고난에 대한 깊은 공감 이 모든 것은 분리보다는 깊은 연결과 열정을 필요로 합니다.
셋째, 마음 챙김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몸과 동작들, 생각, 감정, 욕구, 사고 등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경험을 관찰하는 노력을 합니다. 관찰의 주체로서 관찰적 자기(self)를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기독교적 관점은 관찰적 자기로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할도 강조합니다.
깨달음이나 의식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자기 자신을 강조하는 마음 챙김 명상과는 달리 기독교적 관점은 인간은 죄성으로 인해 온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며 그것을 도와주는 분이 성령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넷째, 마음 챙김 명상은 성경적 명상이나 기도와는 다릅니다. 마음챙김명상은 생각을 뛰어넘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명상과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려는 것이거나 하나님과 신비한 일치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의미 있는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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