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가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때부터 유대인에게는 유배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 2세가 등장하면서 그 위협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597년 느브갓네살 2세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 도시의 유지급 인사들을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유다의 왕 여호와긴과 그의 가족들은 물론, 많은 국가 관리, 군사지도자, 수공예인, 대장장이 등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기원전 587/586년에 예루살렘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끌려갔습니다.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람의 수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레미야 52장 30절에는 4,600명으로 나와 있으나 남자, 여자, 아이 등을 합산하면 수천 명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백성들 중 가장 비천한 층의 사람들만 남겨두어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유다 같은 고대 농촌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형성했습니다.
대규모 강제 이주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기본 외교 정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공동체 전체를 원래의 고향에서 이주시켜 다른 지역에 정착시키는 것은 제국의 막강한 힘을 보여 주는 좋은 방법입니다. 이 정책에는 실용적인 혜택도 있었습니다. 반항적인 공동체 지도자들을 그들의 근거지에서 멀리 이주시켜 제국의 보안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가족과 함께 있는 반란 세력은 다른 곳으로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피정복민 중에서 이런 위협 분자를 군인 건설노동자, 농부로 써먹을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이들 포로들은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구가 격감한 지역에 강제 이주되어 농업과 건설의 일을 맡았습니다.
유배자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여호아긴 왕은 몇 명의 수행원과 함께 바빌론에 감금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562년까지 그는 살아 있었고 바빌론에 있던 다른 왕들보다 대우를 받았습니다. 수공예인과 대장장이는 그들의 일을 계속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을 것입니다. 바빌론 당국은 포로들을 한 군데에 두는 정책을 유지했으므로 유다 사람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나마 사회적, 종교적 문제에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니푸르 지역으로 보내졌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유대 공동체들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조언을 따랐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배자 집단에 보내는 한 편지에서 '거기에 집을 짓고 살아라. 과수원을 새로 짓고 과일을 따 먹으며 살아라. 장가들어 아들 딸 낳고 며느리와 사위를 삼아 손자, 손녀를 보아라. 인구가 줄어서는 안된다. 불어나야 한다. 하나님께 쫓겨 사로 잡혀가 사는 그 나라가 잘되도록 힘쓰며 잘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 나라가 잘 되어야 너희도 잘 될 것이다 (예레미야 29:5-7).
실제로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서 안전하게 살았습니다. 일부는 농사를 지었고 일부는 상인이 되었으며 일부는 왕실의 행정관을 맡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유다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을 때에도 상당수의 유대인은 그대로 바빌로니아에 남았습니다. 바빌론은 중세에 이르기까지 유대 문화와 학문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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