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운동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개혁운동의 면모를 아울러 갖추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배경이나 원인 또한 단순히 종교적 측면에서만 찾아서는 안되고, 거기에는 정치적 사회경제적 요인도 작용하고 있었음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개혁 운동의 주된 원인이 후자에 있었다는 것은 아니며, 그 일차적인 원인은 역시 종교적인 측면에 있었습니다.
중세 가톨릭에 대한 반항운동을 일으키게 한 제1차적인 요인은 가톨릭 교회 자체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권위의 급격한 하락 현상이었습니다. 14세기 초에서 15세기초까지의 교회의 바빌론유수와 대분열은 교황의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습니다. 거기에다 교황의 세속화와 교회의 타락, 부패가 극심하여 이들에 대한 사회의 불신은 더욱 커졌습니다. 우선 성직자들 중에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가 많았습니다. 성직자의 독신주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아 축첩은 예사가 되었습니다. 교황부터가 이러한 타락과 부패의 본보기여서 가령 교황 알렉산더 6세 같은 경우에는 8명의 서자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성직의 매매가 일반화되고 겸직자와 부재 성직자가 허다하였습니다. 이러한 부정한 방법을 통하여 교황이나 고위성직자는 막대한 수입을 올려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는가 하면, 하급 성직자 중에는 심지어 술집이나 도박장을 열어 모자라는 교구수입을 보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와같은 갖가지 교회의 부패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이른바 면죄부의 판매였습니다. 면죄부란 본래 죄에 따른 일시적 처벌, 즉 현세와 연옥에 있어서의 처벌의 전부 또는 일부의 면제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지옥에 있어서의 영구적 처벌의 면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면죄부는 13세기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하여 발전된 이론인데 이것에 의하면 예수와 성자들이 쌓아놓은 막대한 공덕중의 일부를 교황이 떼어내어 이를 일반신도를 위하여 사용하여 그들이 받을 처벌의 일부를 면제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면죄부는 처음에는 자선 행위자, 십자군 병사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면죄부가 돈을 받고 팔리기 시작한 것은 탐욕스러운 르네상스 교황들이 이를 수입 증대의 수단으로 삼으면서부터입니다. 게다가 이것을 판매하는 방법이 더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흔히 은행가에게 맡겨졌던 것입니다. 가령 아우구스부르크의 푸거가는 교황 레오 10세를 위하여 면죄부의 판매업무를 맡았는데 푸거가는 판매액의 3분의 1을 가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 판매업자들은 무식한 민중들로 하여금 면죄부가 천국에 이르는 패스포트인양 믿게 함으로써 그 판매액을 늘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항운동을 일으키게 한 보다 근원적인 종교적 원인은 이와 같은 교황권의 실추나 교회의 타락보다는 오히려 가톨릭교의 교리자체 안에 있었습니다. 개혁가들이 반대한 것은 교회의 부패보다는 가톨릭교 자체, 즉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완성된 가톨릭교의 교리 자체였습니다. 가톨릭 교리는 사람이 신에게서 의지의 자유와 함께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릴 힘을 부여받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신의 은총의 도움없이 혼자의 힘으로 이 선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신의 은총을 사람에게 전달하는 불가분의 수단인 성사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사의 이론과 선행의 필요성과 성직자의 권위를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이러한 가톨릭교의 교리에 맞서 바울의 서신에 입각한 성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를 내세웠습니다. 이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사악한 것이며 따라서 사람은 선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완전히 신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오직 신이 예정한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죄의 이론, 인간의 완전한 타락, 예정의 교리, 의지의 예속성 등에 바탕을 둔 새로운 구원의 길을 내세움으로써 보다 원초적인 기독교로의 귀환을 주장하여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교리나 의식을 반대하고 신과 성도 사이의 중개적 역할을 자처한 성직자의 능력을 강력히 부정하였던 것입니다.
정치적 요인과 함께 사회경제적 요인의 작용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당시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세기에 교회나 수도원이 가지고 있는 토지는 독일의 경우 전체 토지의 약 3분의 1, 프랑스에서는 약 5분의 1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이들 교회의 토지는 면세의 특권까지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개인소유지 특히 상공업자의 재산에 대한 과세가 그만큼 무거워진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밖에도 교황은 이른바 가구세, 십일조, 모든 성직자의 첫해 수입에 부과되는 초수입세, 그리고 성직의 판매등으로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각국의 군주들은 이러한 교회재산에 주목하여 기회만 있으면 이를 차지하려고 하였으며, 경제 사정이 어려워진 지방의 귀족들도 자기 영내의 교회재산에 대해여 탐욕스러운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교황청에 흘러 들어간 막대한 돈이 종교적 목적보다는 세속적 교황들의 호사스러운 궁정에 탕진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요인들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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