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히포의 주교 성 어거스틴은 방대한 저작을 남긴 저술가였고 신학자였습니다. 그의 저작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이면서 쉽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저작은 고백록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로도 유명합니다. 어거스틴은 354년 로마의 속주인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헤트리시우스는 임종 당시 기독교로 개종한 이교도였습니다.
4세기 중엽 북아프리카는 로마제국의 식량을 제공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로마 정부의 부패는 극에 달했으며 제국은 야만족들의 침입에 의해 붕괴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소년시절을 이러한 상황속에서 보냈습니다. 또한 그가 평생토록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이교도들의 끊임없는 공격에 맞섰던 것도 바로 이러한 상황하에서였습니다.
학문적 재능이 남달났던 소년 어거스틴은 집을 떠나 마다우라와 카르타고에서 공부했는데, 아버지가 더 이상 재정적인 뒷받침을 할 수 없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 16살까지 이 공부는 계속되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한 여인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고 그 여인과의 관계는 15년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고백록에서 어거스틴은 젊은 날의 무절제했던 생활을 후회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어거스틴은 19살이 되자 철학적 진리를 찾아서 페르시아의 마니교를 연구하였습니다. 기독교와 영지주의, 그리고 이교를 결합시킨 이 사상은 빛과 어두움, 육체와 영혼의 다툼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마니교와 그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에 심취해서 9년을 보내게 됩니다.
383년 어거스틴은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갔습니다. 그리고 1년 뒤 교수직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밀라노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종교를 다시 만난 것은 바로 여기에서였습니다. 고백록에 의하면 어느 날 어거스틴이 정원에 앉아 있는데 어린아이들이 그에게 라틴어로 된 책을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무심코 바울의 로마서를 펼쳐 들고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3-14).
이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어거스틴은 그 도시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를 찾아 갔으며, 주교가 설교하는 예배에 자주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았고 391년에는 사제서품을 받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4년 후 그는 히포의 주교로 선출되었고, 43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16살에 가출해서부터 16년 동안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도했고 어거스틴은 방탕한 생활로 사생아까지 낳았지만 마침내 32살에 회심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신학, 철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톰과 함께 어거스틴은 양적으로 볼 때 초대 교회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학자 중 하나였습니다.
한때 방탕한 삶을 살았던 어거스틴은 마음으로부터 회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야말로 복음의 근본 메시지 입니다. 은총에 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기독교 사상에 영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서방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당시 교회 안에는 터툴리안이나. 오리겐, 아다나 시우스 등의 삼위일체론은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 종속한다는 종속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터툴리안이나 오리겐, 아다나 시우스 등이 주장한 삼위일체론을 배제하고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에 일체성을 강조하며 ‘인격’ 면에서도 완전한 동등성을 가르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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