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법률을 공부하려는 한 사람이 터벅터벅 시골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를 퍼부었고, 곧 천둥과 번개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나그네는 별안간 강력한 번개에 맞아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는 일어나려고 애쓰며, “성 안나여 저를 구해주소서 구해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라며 신음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한 약속대로 수도사가 되었지만 수도원에 있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늘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그림자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때가 1505년이었으며 그 사람의 이름은 루터입니다.
1511년경 루터는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깊이 깨닫고 고해실에 들어가 6시간 동안 참회했습니다. 그러나 죄책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흐느끼며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라고 자신에게 물었지만 나는 하나님을 미워한다라는 대답만 들렸습니다. 수도원장은 그를 비텐베르그 대학으로 보내 공부시켰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에 집중해 보아도 마음속을 느껴지는 격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때 루터의 고뇌를 이해하려 애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텐베르그 대학의 성경교수 슈타우피츠였습니다. 슈타우피츠는 부패한 교회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꿰뚫어 본 노년의 신비주의자였습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가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배나무 아래 제자와 나란히 앉아 자신이 결심한 바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를 후계자로 삼고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칠 기회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를 끈질기게 괴롭혀온 질문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의롭지 못한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루터는 해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탐독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바울의 서신을 읽던 중 의라는 단어가 의로운 상태를 뜻할 뿐 아니라 누군가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일뿐 아니라 죄인들에게 의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루터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는 말씀에 주목했습니다. 그러자 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1517년 루터가 진리안에서 얻은 평화는 그 진리를 향한 폭발적인 열정으로 변화했습니다. 그 폭발에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도미니크파의 수도사 테첼이었습니다.
나중에 루터는 독일의 마인츠 지방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앨버트는 나인츠의 대주교이자 그곳을 통치하는 제후였습니다. 그때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완공하기 위해 헌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인츠의 제후와 거래했습니다. 마인츠 지방에서 면죄부를 팔 수 있도록 허락할 테니 그 이익금을 절반씩 나누자는 것이었습니다. 앨버트가 수족처럼 부리는 심복 가운데 테첼이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궤짝에 땡그랑하고 동전이 떨어질 때마다 그대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루터는 테첼이 교회의 권세를 남용하는데 격노했습니다. 루터는 그 면죄부 행상인들과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논쟁을 벌일 논제 95가지를 분노에 차서 써 내려갔습니다. 루터는 면죄부에 관해 테첼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하려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소망이 전 세계를 뒤흔들어놓고 말았습니다.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던 것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95개 조항을 적은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대학 예배당 문에 못 박아 게시했습니다. 몇몇 학자들이 웅성거리기는 했지만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의 95개 조항에 대항하기 위해 주님이여 일어나소서 라는 제목의 교서를 발표하여 난폭한 돼지가 주님의 포도원에 침입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난폭한 돼지란 루터였고 주님의 포도원은 교회였습니다.
두 달 후, 루터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에는 안전하게 호송해 줄 테니 황실의 회의에 참석하여 귀하의 책에 대한 몇 가지 질문에 답해 주시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황실의 회의를 일컫는 라틴어 단어는 디에트이다. 그 회의는 보름스라는 독일의 도시에서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회의를 보름스회의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죽음을 각오하고 디에트에 참석했습니다. 4월 15일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주교가 바닥에 쌓인 책 더미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것들을 썼소?” 루터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쓴 것이 맞소.” 그러면 이 책들과 관련하여 당신의 입장을 변론해 보라는 주교의 요청에 루터는 평소처럼 도전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낮게 대답했습니다. 루터는 땀에 젖은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가 되었소.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단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오.” 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작센지방을 통치하는 통치자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보름스에 병사들을 파견했습니다. 루터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5명의 병사가 마차를 공격하고, 그의 눈을 가리고 그를 버려진 어느 성으로 데려갔습니다.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그를 납치한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10개월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그동안 12명의 시토파 수녀들이 그의 사상을 받아들여 수녀원을 떠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수녀들을 수녀원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 중죄에 해당되었으므로 루터의 친구 하나가 청어를 담는 큰 통에 수녀들을 담아 마차에 싣고 몰래 수녀원 밖으로 빠져나왔습니다. 12명의 수녀 가운데 8명은 결혼했습니다. 3명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공격적인 성격을 지닌 26세의 처녀 캐서린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캐서린이 루터와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때 루터는 42세였고 결혼에 관심이 없었지만 캐서린과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0) | 2024.05.18 |
---|---|
존 칼빈 (John Calvin)의 생애 (0) | 2024.05.12 |
십자군 전쟁 (4) | 2024.05.06 |
성 어거스틴 (Saint Augustine)의 생애 (4) | 2024.04.28 |
A. 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0) | 2024.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