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민족의 이동 이후 계속된 오랜 혼란상태가 끝나 서유럽사회가 봉건영주들과 로마가톨릭의 지배하에 안정을 되찾고 점차 성장의 길로 들어서게 되자 서유럽 세계는 그 세력을 외부로 신장하는 기운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동방 오리엔트에서는 새로 셀주크 투르크가 일어나 압바스조의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소아시아를 비잔틴제국으로부터 빼앗아 직접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서쪽 이베리아반도에서도 한때 열세에 몰려 있던 이슬람교도들이 다시 힘을 되찾아 아라곤, 카스틸라 등 북부 기독교 국가들에 대한 반격에 나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7세기말 이래로 줄곧 공격만 당하여 왔던 서유럽 기독교 세계가 이제는 거꾸로 공세를 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바로 십자가 원정이었는데, 이것은 그동안 거듭된 이슬람교도들의 유럽세계 침범에 대한 하나의 복수전이라 할 수 있으며 전성기에 접어든 중세 유럽 사회가 밖으로 그 힘을 과시하고 뻗쳐 나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세 그리스도인은 성지순례에 나서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순례자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유물이나 성인의 유골이 안치된 성지를 여행했습니다. 순례의 절정은 예루살렘 여행이었습니다. 말세에는 천상의 예루살렘이 지상의 예루살렘으로 하강해서 죽더라도 성지에서 죽으면 최후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것이 순례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보기에 순례자의 여정을 방해하는 것은 구원을 가로막는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638년 이후 예루살렘을 장악한 무슬림 역시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인정해서 팔레스타인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약 1만 2천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순례단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셀주크 투르크족이 예루살렘을 지배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초반에 폭력을 행사하던 투르크족은 시간이 지나면서 순례자들에게 상당한 금액의 통행세를 부과했습니다. 당연히 순례자들 사이에서 불평이 늘었고 이 무렵 비잔티움 황제가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말 많고 탈 많은 십자군 원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십자군은 십자가를 옷의 표식으로 매단 자들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는데 12세기 이후 십자군을 가리키는데 줄곧 사용된 일종의 별명이었습니다. 여덟 차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십자군의 원정 횟수 역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는 팔레스타인 성지에 투입된 대규모 군사원정을 중심으로 십자군 운동에 접근했습니다.
십자가 원정의 직접적 계기를 만든 것은 비자틴황제였습니다. 1095년 비잔티움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투르크와의 싸움을 위해서 도움을 청하는 서신을 교황에게 보냈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무슬림에게서 성지를 되찾으려고 적극적인 행보에 나섰습니다. 우르바노의 이런 행동은 무질서한 기사들을 자기 깃발아래로 결집시키려는 정치적 복선을 깔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프랑스 클레르몽에 설치된 목재연단에서 청중의 감정을 건드리는 설교를 했고 결론은 교황은 군사적 응징을 제안했습니다. 수백명의 귀족과 농노, 신부와 수도사가 자신들의 겉옷에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교황은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걸려있는 소송을 취하하고, 집을 비우는 동안 재산의 보호를 약속했습니다. 유럽 전역에 파견된 주교들이 교황의 발언을 빠짐없이 전했습니다. 교황의 요구에 부응해서 대략 15만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기사나 영주처럼 중무장한 군인과 사제, 귀족의 자제와 민간인들 이외에도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노인까지 동원되었습니다. 교황이 1096년 8월 15일을 출정일로 결정하자 서유럽 전체가 출정을 준비하느라 술렁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가 원정은 그 후 13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중 대규모적인 것만도 7, 8회나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 번에 걸쳐 수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의 성과는 대단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종교적인 열광으로 성지를 향해 나아간 최초의 십자군은 어렵게나마 성지에 도착하여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의 수중에서 탈환하고 여기에 봉건제에 입각한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군 자체의 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슬람교도들의 분열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후 이슬람교도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기독교인들을 공격하자 1187년 예루살렘이 다시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십자가 원정이 이후에도 몇 차례 시도되었으나 제5회 때 역시 이슬람교도들의 내분을 이용하여 잠시 성지를 되찾았을 뿐이고 예루살렘은 줄곧 무슬림의 지배하에 남아있었습니다.
본시 십자군은 조직화되지 않고 체계화되지 않은 군대였습니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농민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 사람들이 참가한 이 원정군은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했으며, 국왕이나 제후 등 지휘자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잦아 통일 행동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제각기 군장비도 다른 데다가 체계적인 훈련도 받지 못하였고, 군기 또한 엉망이었습니다. 더욱이 보급망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식량을 비롯한 모든 보급품은 원정 도상의 현지에서 조달하여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오합지중이었던 것입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제1회 십자군 때 맨 먼저 원정길에 올랐던 농민 십자군으로서 이들이 지나간 유럽의 마을들은 그들의 약탈과 방화, 그리고 무자비한 살상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수백 명의 정예 기사로 된 구원병력을 기대했던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는 이 인간 메뚜기의 대군에 놀라 서둘러 이들을 해협 넘어 소아시아의 땅으로 호송해 보냈습니다. 소아시아에 들어간 뒤에도 그들은 저희들끼리 싸우며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일에는 능했으나 막상 투르크족과의 싸움에서는 대패하여 이들에게 섬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십자군에게는 종교적 열정만은 넘쳐있었습니다. 농민 십자군에 이은 기사 십자군은 소아시아, 시리아를 거쳐 드디어 성지 예루살렘에 도달하였습니다. 성지를 점령한 그들은 거룩한 땅에 엎드려 입맞추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수많은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러나 회가 거듭됨에 따라 점점 종교적 열정마저도 사라져, 정치적 야심이나 상업상의 이해가 오히려 원정의 주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1204년의 제4회 십자군이었습니다. 십자군 병사들은 베네치아 상인의 요청에 따라 성지 아닌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여 비잔틴제국을 넘어뜨리고 그 자리에 라틴제국을 세웠습니다. 당시 지중해 무역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플의 상인들과 맞서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의 이익을 위해서 십자군이 성지회복이라는 그 원래의 목적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십자군은 결국 성지회복이라는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채 끝나, 유럽세계의 외부로의 진출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전성기에 접어든 유럽세계의 힘의 팽창을 표시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계속됨에 따라 점차 중세 유럽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군 원정을 성전으로 간주하는 것도 비판을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군 원정은 거룩한 전쟁일 수 없다고 비판하는 이들 가운데는 볼테르, 흄, 디드로, 기번 등이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는 교황의 권위는 십자군에 의하여 더욱 올라가 13세기 초엽의 이노센트 3세 때에 교황권은 그 절정에 도달하였으나 궁극적으로 성지회복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도 차츰 식어지고 교황의 권위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주동역할을 맡았으며 가장 많은 희생을 바쳤던 기사계층의 몰락을 촉진하여 봉건제 붕괴의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군에 의하여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던 서유럽인들은 선진 지역이었던 이슬람세계나 비잔틴 제국과의 접촉이 늘어남으로써 그들에게서 큰 영향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동방과의 접촉은 서유럽인들의 견문을 넓혔을 뿐 아니라 동방무역을 급성장시킴으로써 서유럽의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을 한층 더 촉진시켰으며, 이에 수반한 화폐경제의 발달은 기본적으로 자급가족이었던 장원경제를 무너뜨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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