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1509년 7월 10일, 그러니까 루터가 저 유명한 95개 조를 비덴베르크 교회 문에 내걸던 바로 8년 전 프랑스 빠리 동북쪽 60마일 지점에 있는 삐까르디, 노용에서 다섯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많은 부분을 파리에서 학창 생활로 보내며 사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세기의 스콜라 신학 연구를 중단하고,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1528년부터 법률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르페브르 에따쁠레나 귀욤므 부데와 같은 학자들을 알게 되었으며, 그들을 통하여 그는 당시 프랑스에 유행하던 기독교 인문주의와 접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기에 매료되어 1532년 4월에는 자신의 최초의 저술인 세네카의 『자비론』에 대한 주석을 자비로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즈음에 회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하여 시편 주석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 나는 로마 교회의 미신에 너무 성실하였기 때문에 쉽게 이 깊은 진창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갑자기 나를 회심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이 회심을 통하여 내 마음을 정복하시고 교훈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삼으셨습니다.” 회심의 결과 칼빈은 법률 연구를 버리고, 성경연구와 종교개혁 사상 연구에 한층 더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1536년 4월 칼빈은 기독교 사상상 가장 유명한 『기독교강요』를 바젤에서 출판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2년도 채 못 되는 짧고 불운했던 제네바의 종교개혁 사업을 부득불 중단하고, 1538년부터 1541년까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그의 생활은 그에게 신학 강의와 목회의 풍부한 경험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후 그는 다시 제네바의 초청을 받아 돌아와서 중임을 맡았으며, 1564년 5월 27일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23년 동안 제네바에서 개혁 사업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일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복음과 교회와 사회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을 쏟았던 것입니다.
칼빈이 그의 신학 작업을 시작했을 때 종교개혁 운동은 발전의 제 2국면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루터와 다른 지도자들 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세기 동안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고, 진리를 모호하게 하였던 그 옛 형식들을 강하게 타파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은 설교, 저술, 회의, 논쟁 등 많은 것들을 고무하였으며,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대중들은 새로운 경험과 이상과 소망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러나 옛 속박이 제거됨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것은 도덕적 표준과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방종한 사색운동이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칼빈은 새로 발견된 성경의 교훈과 성령의 능력에 따라 당시 유럽의 상황에 적합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노동, 교회와 공동생활 등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정의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신학사상과 그 표현에서 복음을 더 확고하고 충분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환상과 질서를 명확하게 심어 주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능력 있는 설교, 사상의 명료성과 단순성, 그리고 실천력과 도덕적 성실성 때문에 그 시대의 탁월한 지도자로 인정되었는데, 이런 점들로 인해서 그는 제네바에서 자신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제네바는 칼빈으로부터 신앙과 교육과 정치와 용감한 시민의식과 명예에 대한 높은 자존심을 상속받았습니다.
본 글은 신복윤박사의 칼빈의 신학사상에 소개된 칼빈의 전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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