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eman(1988)은 명상을 집중방식(the path of concentration)과 통찰방식(the path of insight)으로 나누었습니다. 집중명상은 특정한 대상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모든 헛된 생각을 멈추게 하여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방법입니다. 마음이 그 대상을 향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 그것을 관통하고 몰두하여 마음이 그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p. 7). 진언이나 만트라를 사용하는 명상법이 여기에 속합니다. 반면 통찰명상은 특정자극에만 배타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극에 마음을 열고 비교, 분석, 판단 없이 순수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김정호, 1996). 일반적으로 관상기도와 초월명상을 집중명상으로, 마음 챙김 명상을 통찰명상으로 분류합니다.
고대에 기원을 두고 있는 관상기도가 1970년대 미국에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되어 한국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안에서도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목회자들 가운데 일부는 관상기도를 통한 내적인 변화가 물량주의나 성장주의 등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치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관상기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관상기도가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플라톤 철학과 동양의 신비사상에 기초한 것이기에 이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영환, 2012).
1. 개념 및 배경사상
관상은 영어로 contemplation이고, contemplation은 라틴어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에서 유래된 것으로 ‘실체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라영환, 2012). 클레멘스, 오리기네스, 그레고리 등 그리스 교부들은 신 플라톤 학파에서 관상이란 의미로 테오리아(theria, θεωρία) 단어를 빌려왔습니다. 이 단어는 진리의 지적 시각을 뜻하며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최고의 활동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테오리아를 라틴어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로 번역하였고 이 뜻이 기독교 전통으로 내려왔습니다.
6세기 말경 교황 그레고리 1세(Great Gregory)는 관상은 사랑으로 충만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레고리에 따르면 관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얻어지는 열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관상은 또한 하나님 안에서의 쉼인데, 이러한 쉼과 고요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하고 이것은 평정의 상태, 깊은 내적 평화의 상태로 인도합니다. 이 상태는 모든 활동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며, 하나님 현존에 대한 사랑을 경험하는 상태입니다(Keating, 1994/2012, p. 191).
관상기도는 플라톤에서 시작된 부정신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부정신학은 인간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인식할 수도 다가갈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성적 기도나 정서적인 기도로는 하나님께 다가가는데 한계가 있음으로 인간적인 모든 능력을 내려놓고, 자아가 한없이 작아져서 무(無)가 될 때에 하나님의 현존을 충만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관상기도는 침묵기도인데 침묵이란 언어가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개념, 상상, 의지, 기억 등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입니다(남성현, 2007, pp. 103-104). 12세기 경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빅토르의 후고와 리처드, 티에리의 윌리엄 등과 같은 영성 지도자들은 기도와 관상의 신학적 이해를 발전시켰고 이들의 가르침에 따른 묵상 방법들은 13세기 프란치스코의 수도회에 의해 대중화되었습니다(Keating, 1994/2012, p. 193).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에서도 신비주의적인 기도인 관상기도에 반감을 갖게되어 관상기도가 거의 사라지고 수도원 안에서만 관상기도의 전통이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양의 신비한 명상들이 서양에 유입되어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관상에 대한 수도원의 전통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할지 묻기 시작했습니다(Keating, 2007, p. 367).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교황의 지시로 초기 기독교의 관상적 가르침을 부흥시키고자 하여,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이 관상기도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고 그의 사망 이후 1970년대 초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과 윌리엄 페닝톤(William Pennington) 신부가 관상기도에 대해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Wilhoit, 2014).
이들이 만든 기도는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머튼의 주장에 따라 센터링기도 혹은 향심기도로 불리기도 합니다(이은선, 2015, p. 82). 향심기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관상기도 자체가 아닌 관상을 준비하는 기도입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이는 관상기도의 첫 사다리입니다(Keating, 2009/2011, p. 41). 또는 전통 속에서 내려온 관상기도를 현대인들에게 보다 적합한 형태로 만든 현대식 관상기도가 향심기도라고도 합니다(남성현, 2004, p. 105). 특히 1974년에 윌리엄 메닝거(William Meninger)가 우연히 『무지의 구름』 The Cloud of Unknown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책이 관상기도를 가르치는 데 좋은 교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키팅이 기도방법으로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Wilhoitt, 2014).
2. 수련법
첫째, 거룩한 단어를 선택합니다(Keating, 1994/2012, p. 42). 생각이나 지각이 의식 속으로 들어올 때 거룩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즉 생각이나 지각 내용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함을 알아차리면(쉽게 설명하면 잡념이 들어오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갑니다(Keating, 2006, pp. 27-28). 거룩한 단어란 하나님, 아버지, 아멘과 같은 한, 두 어절의 단어입니다. 거룩한 단어가 생각을 사로잡기 때문에 기도하는 동안에는 거룩한 단어를 바꾸지 않습니다. 거룩한 단어 대신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내적으로 보거나 호흡을 주목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더 적절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단어는 초월명상의 만트라와는 다릅니다. 만트라와 같이 무의식에 들어갈 때까지 만트라를 계속 외는 것이 아닙니다(Keating, 1994/2012, p. 120).
둘째, 편안하게 앉아 눈을 감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거룩한 단어를 떠올입니다. 어떻게 앉든지 간에 등을 꼿꼿하게 합니다(Keating, 2017). 거룩한 단어는 상상 속에 간직하는 것이고 입술이나 목소리로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Keating, 2009/2011, p. 43). 이것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지향(intention)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주의를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주의를 연습하는 수련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향 훈련입니다. 습관이 강화되어 성령이 우세해지면 기도 중에 단어나 상징을 쓰는 일이 점차 줄어듭니다(Keating, 2009/2011, p. 49).
셋째, 생각들이 마음 속에 들어왔음을 인식하게 되면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갑니다. 생각들이란 몸의 감각, 느낌, 지각, 이미지, 기억, 영적 경험, 계획, 개념 등을 포함합니다(Keating, 2017). 즉 생각이란 관념이나 이미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안팎에서 오는 감각적 인상들과 영적인 감각까지 의미하며 어떠한 지각내용도 모두 생각이라는 개념에 들어갑니다(Keating, 2009/2011, p. 61).
넷째, 기도가 끝나면 눈을 감고 몇 분 동안 침묵 가운데 머뭅니다. 몇 분이 일상생활로 돌아오게 합니다(Keating, 2017).
관상기도에는 습득적 관상기도와 주부적 관상기도가 있는데, 습득적 관상기도는 개념이나 상징,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방법입니다. 신자들이 관상기도한다고 할 때 대부분 이 단계에 머뭅니다. 주부적 관상기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개념, 이미지 상징 등을 내려놓음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 주시고 알려 주심을 직접 체험하여 그 분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집니다. 이 무념적 방법의 기도는 수동적 측면이 중심이 되는 기도입니다. 기도자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데도 은혜가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박노열, 2009, pp. 127-128).
관상의 초기 단계에서 생각들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데 가장 쉽게 일어나는 것이 산만한 상상들입니다. 상상은 영구적으로 움직이는 심리적 기능이므로 항상 일어납니다.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침묵기도 중 산만한 상상 중에 어떤 특정한 생각에 흥미를 갖게 되고 주의가 그 방향으로 움직임을 감지하게 됩니다. 침묵기도 중에 무슨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단순히 그 주의를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이러한 지향을 나타내는 표시로 거룩한 단어를 떠 올립니다. 관상기도 시간은 아주 좋은 생각이라도 그것을 떠나보내는 시간인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생각의 부재라기보다는 생각으로부터의 초연함입니다(Keating, 2006, p. 31). 현재 순간의 생각과 감정을 넘어서 절대신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몸과 가슴과 감정 즉 우리의 전 존재를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관상기도 중에 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부정하거나 억누르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단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은 가도록 내버려 두고 그 너머로 가는 것입니다(Keating, 1994/2012, pp. 28-29).
하나님과 일치되는 순간에는 자아에 대한 성찰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생각이 존재하는 한 온전한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일치의 순간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Keating, 1994/2012, pp. 99-100).
3. 목적 및 효과
관상기도의 목적은 평화를 경험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 영원한 일치상태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무의식 속에 있는 장애를 비우는 것에 있습니다(Keating, 1994/2012, p. 140). 불교나 동양에서 행해지는 명상들 즉 요가나 초월명상은 마음의 휴식이나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관상은 긴장해소훈련이 아닙니다. 신자는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것에 일차적 관심이 있습니다. 관상기도의 정수는 관상기도를 하면서 무슨 체험적인 경험을 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내재하신다는 것을 순수한 믿음으로 믿고 순종하며 나가는 데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침묵 속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과의 일치(친교)를 지향합니다. 관상기도와 관상상태는 다른데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지향한다고 할 때 관상상태는 관상기도나 기타 다른 헌신적인 행위들로 인해 하나님과의 합일이나 친교에 있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즉 관상기도를 통해 관상에 이릅니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에게 말씀하실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Keating, 2006, p. 16).
관상기도의 효과들 중 하나는 무의식속에 있는 에너지의 방출입니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심리 상태를 갖게 되는데, 그 하나는 영적 위안을 통한 형태로 오는 개인적 발전을 경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멸감을 주는 자아의식을 통한 인간적 약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아의식은 자기 인격의 어두운 면을 의식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전통적 용어입니다(Keating, 1994/2012, p. 31). 키팅은 관상기도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Heffern, 2011).
4. 기독교적 평가
일반적으로 관상기도는 성경보다는 동양의 신비종교의 수련법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첫째, 관상기도와 동양의 명상과 방법론에 있어서 유사성은 ‘거룩한 단어’ 방법에 잘 나타납니다. 관상기도에서 거룩한 단어를 묵상하는 것은 초월명상에서 만트라를 반복하는 것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현대 관상기도 운동은 동양의 선, 요가와 같은 수련 방식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한다면 기독교의 기도나 묵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명상에서 만트라를 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하고자 하는 시도로,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 마음을 열 목적으로 한 단어나 한 생각을 명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단어나 문장을 반복하는 것이 흔히 우리로 하여금 집중하게 하고 내적인 고요함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한다고 주장합니다(Nouwen, 2003, pp. 80-81). 즉 단어 자체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관상기도는 무아의 경지에서 참된 자아를 만난다고 했는데(Rohr, 1999, p. 67), 동양의 명상에서도 무아의 경지에서 참된 자아를 만난다고 주장합니다. 관상기도가 하루에 두 번 한 번에 20분 정도 명상을 권하는 것도 초월명상과 유사합니다.
둘째, 관상기도 주창자들은 부정의 신학, 즉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기 때문에 알 수 없고 오직 관상을 통해서 알 수 있고 관상을 통해서 자아가 신과 연합하는 것을 추구합니다(Merton, 2006, p.263). 기독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추구하지 하나님과 연합을 추구하지 않습니다(라영환, 2012).
셋째, 머튼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인 교리는 부적절한 것으로 믿었으며 실제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면 종교적 단합에 장애가 된다고 믿습니다. 모든 세계 종교의 완전한 연합은 기독교 안에서 신비주의의 형태 없이는 성취될 수 없고 그 기도가 관상기도라고 합니다(Lighthouse Trails Editors, 2010).
기독교계에서는 관상기도에 대해 여전히 찬반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어떤 형식을 빌려 사용하는가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각 개개인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우릴 목적으로 관상기도를 활용한다면 긍정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것이지만 분별하여 사용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본 글은 학술지에 발표된 필자의 논문 “명상의 비교 연구”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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