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대표적 시인이며 작가인 엘리엇(T. S. Eliot)은 “지식 속에서 우리가 잃은 지혜는 어디에 있으며, 정보 속에서 잃은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Where is the wisdom we have lost in knowledge? Where is the knowledge we have lost in information?)라고 노래했습니다(Dewangan, Narayanan & Ghosh, 2021). 거대한 정보가 쏟아질 때 정보로부터 어떻게 지식을 구축할 수 있으며, 거대한 지식 속에서 어떻게 심오한 지혜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 어느 때보다 지혜가 필요한 때문이지 최근들어 심리학이나 교육학에서 지혜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20세기말부터 관심을 갖게 된 새로운 개념은 아닙니다. 지혜는 "고대"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시간, 지식, 심지어 문화를 초월합니다. 원시인이든 문명인이든 많은 사람들은 신화, 이야기, 노래, 그리고 심지어 3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동굴 벽화를 통해 그들의 지혜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려고 노력했습니다(Birren & Svensson, 2005, p. 3). 지혜는 문화 및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현상으로 고대 종교적 전통과 철학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현대 과학적 연구들은 20세기 중반까지 이 주제를 대부분 무시해 왔습니다. 지혜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 따르면 19세기말에 실증적 심리학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지혜라는 주제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해왔습니다. 본 글에서는 동서양의 지혜에 대한 관점을 조명해 보려 합니다.
1. 그리스 세계의 지혜
고대 그리스 철학은 지혜의 탐구였습니다. 대표적인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에 대해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서양 도덕 철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소크라테스는 인식론적 겸손(epistemic humility)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의 저서 『대화』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그의 삶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자유인들이 기대하는 활동인 정치에 참여하는 대신 철학적 탐구에 생애를 받쳤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지혜의 귀감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견해로는 그의 인간적인 지혜는 일종의 인식론적 겸손(epistemic himility)인데 epistemic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지식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즉 선과 도덕적인 삶에의 본질과 같은 가장 중요한 것에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식론적 겸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더 깊은 지혜의 추구를 위해 이런 종류의 지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Swartwood, 2019, pp. 15-16).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인지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인간의 마음이 모든 가능한 지식을 다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생각으로는 지혜는 오직 신들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Currow, 2015/2018, p. 22).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은 잠정적이고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탐구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과 결론을 계속 수정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혜를 찾는 것 즉 철학을 하는 것뿐이며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Dutra, 2022).
고대 그리스인들의 언어는 지혜와 지식을 분명히 구별했습니다. 과학적 이해의 정도나 상세한 사실 설명은 그 자체로 지혜의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혜라는 용어를 정당화하는 이해의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신중함과 올바른 행동에 필요한 실질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혜는 미덕과 가장 세련된 지능의 조합이며, 지혜는 책에서 얻는 지식이나 단순한 지적 민첩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종종 "영리한 불량배의 예리한 눈에서 번쩍이는 좁은 지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지혜로 오인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비록 미덕의 습관은 얻을 수 있지만, 지혜 그 자체는 선천적이고 그것은 시간과 환경에 걸쳐 안정적인 "신성한 요소를 포함한다"고 생각했습니다(Osbeck & Robinson, 2005, p. 65에서 재인용).
소크라테스와 달리 플라톤은 긴 생애에 걸쳐 수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갖가지 주제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보려면 그의 저서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참고하면 됩니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지혜라는 주제를 모아 보면 크게 두가지 논점이 드러납니다. 첫째, 플라톤은 네 가지 기본 덕목, 용기, 절제, 정의, 지혜 중 첫째로 지혜를 꼽았습니다. 이 네 가지 기본 덕목을 지닌 자는 가장 성숙하고 모범적인 인간입니다. 둘째, 지혜는 인간을 신에 가까운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신과 가까운 존재가 되어 갈수록 우리는 인간의 어두운 면과 제약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이러한 견해는 지혜를 지극히 영적인 관점에서 고찰했던 히포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Curnow, 2015/2018, pp.185-186).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플라톤도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답하기 위해 지식과 지혜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지혜는 마음이 모든 것에 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와는 다른 것입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지혜로운 자는 문맹일 수도 있고 어리석은 자가 뛰어난 재주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자, 지식을 가진 자로 나누는 것은 성품의 차이, 자기 통제의 원리, 열정과 욕망을 이성의 권위에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지능지수가 높을 필요도 없고, 어느 한 분야에 대가일 필요도 없습니다. 조화와 아름다움, 진리를 사랑함으로써 기질적으로, 도덕적으로 획득되는 것입니다(Robinson, 1990/2010, p. 30).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첸 윤리학(Nicomachean Ethics) 제 6권에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보다 더 상세하게 지혜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이 미덕에 대해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성인초기까지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언젠가는 미덕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미덕은 특별한 종류의 실천적 지식과 교육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습니다(Dutra, 2022).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에는 실천적 지혜와 이론적 지혜가 있다고 했습니다. 실천적 지혜는 사물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좋고 왜 좋은지)에 대한 이해이고, 이론적 지혜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창조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실천적 지혜는 규범적 진리나 이유(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실 또는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론적 지혜는 묘사적인(기술적인) 진리, 혹은 사실에 대한 이해입니다(Swartwood & Tiberius, 2019, p. 13). 예를 들면 화학, 심리학, 물리학, 생물학, 그리고 수학에 숙달된 박식한 과학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가 박식한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인 갈등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무지하고, 잔인하고 생각이 없으며, 항상 가장 사소한 학문적 성취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면, 그는 묘사적 진실(세상이 어떤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실제로 어떻게 있거나 어떻게 되는 경향이 있는지에 대한 진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만, 규범적인 이유와 진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이론적인 지혜는 가지고 있지만 실제적인 지혜는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이 어떤지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론적 지혜가 실천적 지혜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잘 행동하기 위해서는 우리나 다른 사람들이 한 일과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의도와 감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설명적 사실(플라스틱 형성에 관한 화학 법칙, 일반 상대성 이론 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사회 구조 등)이 잘 사는데 꼭 필요한 지식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론적 지혜, 즉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고 작동하는지에 대한 깊고 포괄적인 이해를 갖는 것은 실천적 지혜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론적 지혜를 완전한 지식에 관여하여 신적인 어떤 것을 아는 것으로 봅니다. 이에 비해 실천적 지혜는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며 개별자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실천적 지혜는 인간의 행위가 자신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데 필요합니다. 즉 인간의 경험을 통해 축적되는 상황적 인식능력 혹은 그로 인한 상황대처방식으로 봅니다(Swartwood & Tiberius, 2019, p. 13).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롭다는 것은 온갖 종류의 인생사에서 중요한 것을 발견하고 도덕적 완성 또는 미덕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Robinson, 1990/2010, p. 35). 똑똑하기만 했지 올바른 가치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올바를 가치를 소유했지만 도덕적으로 서투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덕과 실천적 지혜는 상호결합 관계하에서만 각자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덕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실천적 지혜의 소유 없이는 완숙한 덕을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유원기, 이창우, 2016, p. 102).
요약하면, 논리적 사고와 이해를 촉진한 고대 그리스의 체계는 서구문화에서 지혜의 개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지혜는 주로 진리를 이해하는 동시에 자연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덕은 지혜", 플라톤에게는 "지혜는 선에 대한 지식의 핵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를 구별했습니다. 전자는 주로 서로 다른 영역에서 지식의 문제인 반면, 후자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살펴보면 비록 어떤 지식이 지혜를 위해 필요하지만, 지식의 단순한 증가는 사람을 더 현명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삶을 영위하는 이론적 지식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일상적인 맥락에서 그것을 적용하지 못한다면 현명해지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2. 동양의 지혜
부처(싯다르트 고타마 왕자)는 인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29세에 높은 진리를 찾기 위해 특권적인 삶을 버렸습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어 기원전 600년경부터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그는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네팔 지역의 평민 언어인 팔리어와 비슷한 언어를 구사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주로 반야(般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반야는 지혜 또는 깨달음을 뜻한다. 반야(般若)는 단순히 지식이나 인지적 기능의 한 유형이 아니라, 불교에서는 지식과 행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깨달음의 경험 그 자체의 본질적 속성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반야(般若)는 동정적 행동(悲慈)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동정심은 모든 존재의 가장 심오한 형태의 우정 또는 무조건적인 포용을 가리킵니다. 부처는 지혜로운 사람 또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지혜로운 지식에 대한 의식이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그의 이후의 행동 때문이기도 했습니다(Takahashi, 2000).
부처의 가르침이 평민을 넘어 엘리트와 학자들에게까지 퍼지면서, 수많은 필사본들이 팔리어보다 더 형식적인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제작되었는데 산스크리트어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함께 고대 이래로 가장 널리 사용된 언어 중 하나였습니다. 인도철학에서는 실제 세계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지식은 직관적인 통찰이나 직감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도 철학자들이 말하는 지혜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Curnow, 2015/2018, p. 209).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지혜의 개념이 원래 종교적 또는 초월적 지식의 유형을 암시하는 동사인 vid로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은 "감정으로 직접 안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Takahashi, 2000). 부처 자신이 문자 그대로 평범한 의식에서 더 높은 차원의 초의식 상태로 깨어났기 때문에 '밝혀진다', '깨어난다'(覚))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vid는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현대의 관계적 발달 시스템 관점에서 발견되는 구현(embodiment)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게 신체적 경험을 해야 한다는 포괄적인 지식입니다. 또한 불교의 가르침이 가장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체험입니다 영어의 sage(현자)와 wisdom의 기원이 매우 다른 것처럼 중국에서도 현자(sage)와 지(wisdom)는 다른 단어입니다. 중국철학은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철학을 추구하기 때문에,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지혜 자체보다는 지혜의 화신인 현자들에게 훨씬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혜를 뜻하는 중국어 지(知)에는 지식의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의 지혜는 지식과 연관이 있지만 지식과 같은 개념은 아니다. 중국의 여러 철학 학파에서는 현과 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중국철학자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공자일 것입니다. 공자가 살았을 때의 중국의 혼란은 그가 도덕과 올바른 삶에 집중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유교는 개인의 수양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표방하였습니다. 목표는 개인의 도덕적 질서에 기초한 정치적 질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개인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자기 계발에서 사회 발전이 뒤따랐습니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알고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아는 사람의 특성"이라고 했습니다(Takahashi, 2013에서 재인용). 중국의 지혜는 지식과 연관이 있지만 지식과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유교에서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지혜를 갖추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인(仁)이 필요합니다. 중국어 인은 여기서는 인간애를 뜻하는 humanity로 번역할 수 있고 자비심, 완벽한 선, 인간적인 사람, 인간적인 마음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인은 그 모두를 포용하는 상위개념으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단순한 자비심이나 이타주의보다 넓고 크기 때문에 차라리 그러한 개념의 뿌리로 보는 편이 낫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인을 모든 종류의 인간애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인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비슷한 개념입니다(Curnow, 2015/2018, p. 203).
후대의 유학자 맹자는 사단(四端)이론을 정립하여 지혜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품임을 명시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함으로써 상호 의존성을 가지며 조화롭게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맹자는 "사단(四端)"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이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도덕적 가치를 설명했습니다. 사단은 인, 의, 예, 지입니다. 남을 동정하는 마음은 인간애의 시작입니다. 부끄러움을 알고 싫어하는 마음은 정당함의 시작입니다. 존경하고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예의의 시작입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은 지혜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선하다는 믿음은 맹자철학의 핵심이자 가장 큰 특징입니다. 또한 맹자는 지혜란 본질적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원래 마음의 본질은 맹자의 말이 맞지만 살아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과 취향을 갖게 되고 이러한 것들은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왜곡시키고 현명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게 합니다(Curnow, 2015/2018, p. 203).
서양의 지적 전통은 어떤 특정 개념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동양의 전통은 종종 의도적으로 개념의 정확한 의미를 열어두고 해석의 잠재적 유연성을 향상시킵니다. 따라서 동양의 지혜 해석은 종종 모호하지만 비인지적 지혜 영역을 강조함으로써 더 넓은 의미를 수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양의 지혜에는 자비나 동정심, 인 등이 포함됩니다. 특히, 지혜의 변형적(transformative)이고 통합적인 특징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혜의 변형적 특징은 동양의 영적 실천(예: 요가, 명상 등)과 관련된 초월적 경험과 동일시되며, 인간의 정신이 더 높은 수준을 향한 점진적인 움직임에 관한 것입니다(Moody, 1995). 동양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말을 통해 '지혜가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대신 요가나 명상 같은 매체를 통해 변화와 통합을 경험하도록 지시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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