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영역에서 신비한 것으로 여겨지던 명상이 최근에는 심신의 고통을 치유하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인식되어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명상에는 크게 집중명상과 통찰명상이 있습니다. 집중명상은 특정한 대상에 주의를 집중함으로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방법입니다. 요가, 초월명상 등이 집중명상에 속합니다. 통찰명상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고 알아차림으로써 존재의 실상을 체득하는 지혜를 얻는 수행방법으로 마음 챙김 명상이 이에 속합니다. 본 글에서는 명상의 효과와 기독교적 관점에서 명상을 조명해 보려 합니다.
명상의 효과
사람들이 왜 명상을 하려고 할까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명상을 하려고 합니다. 첫째, 사람들은 심리적 혹은 정서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관리수단으로 명상을 사용합니다. 둘째, 사람들은 삶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의 의식을 확대시키며, 지혜를 얻기 위해 명상을 합니다. 이 경우에는 명상이 의식에 있어 변형의 수단이 됩니다(Coleman, 2001).
명상은 과연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산업화가 고도화 되면서 스트레스와 같은 것들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대처하기 위한 기법으로서 명상이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명상법이 임상장면에 도입되었습니다.
첫 번째 명상법인 집중명상을 임상에 도입한 것은 하버드대학교의 교수인 Herbert Benson이 이완반응을 1970년대 초반에 도입 사용하였습니다. 1977년 미국심리학회가 명상의 임상적 효과에 대한 연구를 요청하면서 심리치료의 맥락에서 명상에 대한 연구들이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이때의 대부분의 논문이 집중명상과 Benson의 이완반응 프로그램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두 번째 통찰명상은 1980년대 미국 Massachusetts 대학교 Kabat-Zinn에 의해서 임상에 도입되었습니다. 통찰명상을 주제로 스트레스 완화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북미에서는 수백여 곳의 메디칼 센터에서 각종 질병의 치료와 예방을 위하여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명상법을 임상에 적용하고 있습니다(장현갑, 2000).
명상의 긍정적인 면들과 부정적인 면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긍적적인 면으로는 첫째, 우리의 정신적 혹은 정서적 상태를 변화시킴으로 우리 신체 상태에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명상을 메타치료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신경계가 모든 스트레스, 흥분 그리고 걱정의 저수지이기 때문에 모든 삶의 긴장은 우리의 신체상태에 반영됩니다. 명상은 스트레스와 같은 유해한 자극에 대한 내분비 호르몬이나 신경전달 물질의 반응성을 유의미하게 감소시키며 또한 과민한 반응성을 정상상태로 회복시키는데 촉진적 작용을 합니다. 즉, 명상이 스트레스로부터 유기체를 보호하는데 양호한 작용을 하며 나아가 명상이 스트레스에 기인되는 각종 정신 질환의 예방이나 회복에 도움이 됩니다. 또 명상이 지나친 자극에 의한 흥분성은 낮추지만 이와 동시에 주의 집중과 같은 각성 반응은 오히려 증가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Gross, 1980).
둘째, 명상이 진행되면 뇌파상으로는 이완 각성상태를 지칭하는 α파와 θ파가 두드러지게 출현합니다. 명상이 더욱 진행되면 θ파와 함께 의식 상태를 표상하는 빠른 빈도의 각성파인 β파의 발사가 전두엽 부위에서 출현하는 특색이 있습니다. θ파 출현과 β파의 발사 그리고 일시적으로 호흡이 정지되는 것은 순수한 의식의 출현이나 신비한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명상 중에 창의성이나 직관력이 증가된다는 것이라든지 삼매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이런 뇌파의 출현과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리해 볼 수 있습니다(Sedlmeier, et al. 2012).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명상이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신체적 심리적 영향을 주고 있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증거들도 많습니다(Carrington, 1993). 명상 중에 일어나는 다양한 환각적인 경험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무게가 없는 듯한 느낌, 신체감각이 없고 빛이나 색, 대상이 사라진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Masis, 2002). 명상자가 이런 왜곡에 대하여 환상적이고 때때로는 황홀경을 느끼기도 하지만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명상하고 있는 동안 명상 자체가 마음의 거울이 되어 개인적인 문제들을 들추어내기 때문에 명상동안 좋지 않은 기억들에 짓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Engle, 2003, p. 43).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떠오르지 않는 원초적인 사고를 명상이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애착에 실패한 사람이나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성격장애자 들은 명상을 사용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Masis, 2002).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은 명상 중에 때때로 일어날 수 있는 깊이 갈등되는 감정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명상의 효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많은 임상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명상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로 부터의 이완과 영성을 추구하여 점점 더 각종 동양의 명상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명상에는 분명히 이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상 이면에는 성경의 영성과 갈등을 일으키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첫째, 많은 동양의 명상들은 구원의 원천이 내부에 있음을 강조하며,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항한 죄가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상태에 대한 무지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내면의 높은 의식의 상태, 즉 변형된 의식의 상태를 추구하고 목표로 합니다. 또한 각성된 의식을 통해 내면의 신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어려움에 대한 답은 높은 수준의 의식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대신해서 이루신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명상이 각각 다른 특성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명상체계는 모두 “궁극적인 실재”와 심리적으로 통합을 추구합니다. 이 궁극적인 실재는 보통 힌두의 브라만과 같은 비인격적인 신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동양의 명상의 이면에 있는 범신론적 개념과는 맞지 않습니다.
둘째, 동양의 명상은 명상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을 비우게 합니다. 자신을 비웠을 때 귀신에게 현혹되거나 사로잡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명상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거나 자신의 마음을 비우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시편 119편)과 그의 창조하심을 바라볼 것(시편 19, 140편)을 권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명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 하늘의 지혜와 통찰이 차게 하여 마음이 위로와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영성체험의 방법이나 기술과 영성의 본질을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챙김, 초월명상, 또는 요가와 같은 동양의 명상법이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와 대치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깊고 참다운 기도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몇몇 동양 종교 및 이들의 독특한 기도방식과 관련된 명상법에 큰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영적인 집중과 신적 신비와의 심오한 접촉에 대한 욕구를 나타내는 뜻있는 표지입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정확히 말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인격적이고 친밀하며 심오한 대화입니다. 곧 자아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부단히 나아가는 전향의 태도를 뜻합니다. 동양의 명상법은 가끔 서양의 기도방식들에 결여되어 있는 정신 생리학적 가치를 인정해 왔습니다. 그것은 모든 신체적 느낌을 영적 체험으로 간주하도록 은연중에 이끌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신체적인 행위들은 평온과 긴장완화의 느낌을 자연히 초래하는데, 이러한 느낌을 성령의 참다운 위안으로 간주하는 것은 영성 생활을 전적으로 그릇되게 이해한 것입니다.
넷째, 동양의 명상법의 확산으로 기독교적 명상을 비기독교적 명상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양의 명상을 기독교적인 묵상을 위한 심리적 준비단계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표상도 개념도 없는 불교이론에 나타나는 절대적인 것(열반)을 유한한 실재를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엄과 같은 수준 위에 서슴없이 올려놓으려 합니다.
본 글은 학술지에 게재된 본인의 논문 “명상에 대한 기독교적 고찰”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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