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영성의 시대라고 했던가요? 신학뿐 아니라 경영과 의학에서도 영성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McGreevy & Copley, 1999). 20세기를 지배했던 세속주의와 과학주의로부터 교육을 구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교육도 예외 없이 교육의 영적 원천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교육에 영적인 차원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미국의 교육자 파커 팔머(Parker Palmer, 1939-)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교육이라면 마땅히 영적 욕구를 중심과 관심사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Palmer, 한국판 서문). 팔머는 현재 미국 고등교육에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공동체, 영성, 사회변화와 같은 문제들을 다루며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저술과 강연을 통해 교육학자와 교육기관, 종교단체에 많은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특히 교사와 교육혁신 운동에 영감을 주며 페쯔 연구소(Fetzer Institute)의 CTT(Courage to Teach)라는 교사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미국 전역에서 많은 교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교육사상이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로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To Know As We Are Known)』, 『가르칠 수 있는 용기(The Courage to Teach)』가 번역되면서부터입니다. 본 글에서는 교사와 교육혁신 운동에 영감을 주고 있는 그의 교육사상을 고찰해 봄으로 우리 교육에 시사점을 찾고자 합니다. 파커팔머의 주요 교육사상 팔머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의 저술을 통해 강조한 주제는 가르침에 대한 것입니다. 본 글에서는 교육에서의 영성, 교사의 내적 생활, 진리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1. 교육에 있어 영성(spirituality in education)
‘영성’은 개념파악이 어려운 다양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 사람이 영적이다 혹은 영적인 생활을 한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삶이 물질적인 성공에 기초하여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고결하고 인격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내적으로 평화를 가진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팔머는 영성을 크리스천들이 경건한 생활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영적인 생활, 기도나 명상의 생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또 다른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팔머가 말한 ‘교육에는 영성이 포함되어 있어야한다’고 할 때 영성은 어떤 종교적 신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보다 더 크고 신뢰할 만한 무언가와 연결되고자 하는 추구를 말합니다(Palmer, 2003).
팔머 자신이 가는 곳 마다 교사들이 그들의 동료나 학생,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분리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Palmer, 1993, p. X). 우리의 교육현장을 보면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 사이의 관계가 다 표면적이고 피상적입니다. 깊은 내면의 교류가 없습니다. 우리의 깊은 문제를 다루기에 부적절합니다. 팔머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육에 영성이 없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때때로 학생들과 대화하기 위해 점수매기는 일, 강의 준비, 논문 쓰는 것을 밀쳐둘 수 있어야 합니다. 교과 내용에만 관심이 있고 학생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관계를 세우는 기회를 잃게 되고 진정한 교육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질문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포함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나 학생들이 인생에서 큰 어떤 것과 연결을 갈망할 때 일상생활에서 흔히 질문하는 “내 인생은 의미와 목적이 있는가?” “세상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재능이 나에게 있는가?” “나는 무엇을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가?” “나와 나의 가족 그리고 나의 친구의 고통을 내가 어떻게 다룰 것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영적인 질문이라고 팔머는 주장합니다(Palmer, 2006b).
내면적으로는 우리와 우리의 학생들은 항상 이러한 영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삶에 있어 중요한 이런 질문들을 드러내어 하기를 꺼립니다. 그런 심각한 질문은 종교에 가져가고 학교의 강의실에 가져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질문은 다른 사람 앞에서 묻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질문이기에 우리의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어떤 문제가 시험에 나올까? ”어떻게 하면 승진을 할까? “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팔머는 교육이 영적이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자가 교과목에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 다루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팔머는 교육에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영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영적인 문제는 체육에서부터 역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목에 들어 있습니다. 영성 즉 연결을 추구하는 것은 교과과정에 첨가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르치는 모든 과목의 중심에 있습니다. 팔머는 실제 교과목을 통해 영적으로 가르치는 실예를 듭니다. 60-70년 전에 일어났던 유대인 학살에 대해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합시다. 학생들은 아마도 지구의 다른 편에서 일어난 끔찍한 이야기쯤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은 그것을 단지 객관적인 사실로 그들과는 동떨어진 세계의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단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매장시키는 일은 없는가? 우리 자신의 내면에 작은 히틀러는 있지 않은가?(Palmer, 2006b). 이런 식으로 깊은 사색을 통해 현재 나의 삶과 연결시키는 것을 교육에 영성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도대체 교사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고 심리치료사나 성직자가 되라는 말인가?” 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팔머는 좋은 가르침은 우리가 우리의 일을 이분적으로 나누어 사실과 느낌, 지적인 것도 영적인 것, 교사와 성직자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라고 충고합니다(Palmer, 2006b). 가르침과 배움이 잘 이루어지려면 감정과 영, 마음과 영혼을 배제하는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통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며 본래 교육은 그러해야 합니다. 한 인간의 영과 정신에 호소하는 가르침이 더 높은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가르침은 지적이고, 정서적이고, 영적인 작업입니다. 지성이란 우리가 가르침과 배움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즉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배우는가에 대한 것, 그리고 학생들과 과목의 본질에 대한 개념입니다. 정서적이란 우리가 가르치고 배울 때 우리와 우리의 학생들이 느끼는 방식입니다. 느낌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 교류되는 것을 확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영적이란 삶의 큰 부분과 관계를 갈망하는 마음에 우리가 대답하는 다양한 방식을 말합니다. 관계에 대한 갈망은 사랑과 일, 특히 가르침이라 불리는 일에 활기를 더해 줍니다. 가르침에는 지적인 것, 정서적인 것, 영적인 것이 중요하며 어느 하나도 간과될 수 없습니다(Palmer, 1998, pp. 4-5). 가르침을 지적인 것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냉정한 추상적인 것이 될 것이며, 정서적인 것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자기도취적인 것이 됩니다. 가르침을 영적인 것으로만 만든다면 세상에 닻을 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통전성을 위해서는 지성, 감성, 영성이 서로 의존하고 그것이 인간 자신과 교육 속에서 서로 혼합되어야 합니다(Palmer, 1998, p. 4).
우리의 교육은 학생들의 지성, 감성, 영성에 호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외우기를 강요하고 사실을 반복하기를 강요하는 등 지적인 영역만 중요시하고 감성이나 영성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을 변화시키는 가르침은 학생들의 감성이나 영성, 내면의 것이 무시된다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 교사의 내적생활(The teacher's inner life)
지도자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Palmer, 2001, 재인용). 그 말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지도자는 생활 가운데서 훌륭한 가치관과 인격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가르침은 가르치는 자의 마음으로부터 흘러 나옵니다. 색소폰 연주자인 찰리 파커(Charlie Parker)는 연주자의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연주자의 악기 속에도 없다고 했습니다. 악기연주를 들을 때 그것이 마음에서부터 연주되지 않는다면 그 연주는 큰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Palmer, 2001). 여기에서 마음은 심장(heart)을 의미하는데 심장이라는 단어는 단지 감정이 위치하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능력, 즉 지성적인 것, 가치 있는 것, 감정과 비전, 직관이 다 만나는 우리 인간 자아의 중심을 의미합니다(Sparks, 2003).
팔머는 훌륭한 가르침은 테크닉이 아니며, 교사의 내면이 좋은 가르침에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좋은 가르침은 교사의 정체성(identity)과 성실성(integrity)에서 나옵니다. 정체성은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내부적인 힘과 외부적인 힘이 교차되는 곳입니다. 성실성(integrity)은 전체성이라할 수 있는데 전체성이 완전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1998, p. 13).
가르칠 때, 교사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학생들과 과목에 투사합니다. 교사가 교실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가르치는 자신의 내적 생활의 소용돌이에 불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르침은 영혼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Palmer, 2006b). 학생과 가르치는 과목을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교사가 자신을 모를 때 학생들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 수 없습니다. 교사는 그들을 더러운 안경을 통해 볼 것이며 결국 그들을 분명히 볼 수 없기 때문에 잘 가르치지 못할 것입니다. 교사가 자기 자신을 모를 때 과목을 개인적인 의미를 가진 깊은 수준에서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깊은 개인적인 의미를 가진 지식으로 가르치지 못합니다(Palmer, 1998, p. 2).
팔머는 교사의 영성 형성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교사의 영성을 위해 전통적인 영성훈련을 권합니다. 팔머 자신이 “나의 직업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영적 생활이고 그것은 마음의 눈에 의존하며, 나의 부업은 지식을 추구하는 교육이고 그것은 정신의 눈에 의존한다”(1993, XXiii)고 했습니다. 가르치는 자에게 있어 영적생활이 가장 중요하며 이것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고 가르침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참다운 영성이 없다면 기독교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팔머는 일반교육에서도 가르치는 자의 영적생활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팔머는 영성훈련을 위해 구체적으로 침묵, 명상, 기도를 강조합니다. 침묵과 명상을 권하는데 침묵 가운데서 모든 만물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강조하는 팔머에게 고독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독과 공동체는 영적생활에서 모순의 양극처럼 공존합니다. 고독은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마음을 갖게 하며 공동체의 결속을 새롭게 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와 동시에 결속을 표현하고 시험해 볼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두 개의 극단적인 세계 중 한 곳에만 산다면 진리의 내적인 내용과 외적인 형식을 다 희생하는 셈입니다. 팔머는 또한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만한 지식은 세계를 나누고 정복하고 파괴하지만 기도 속에서 궁극적인 공간을 발견하고 그 공간 가운데서 진리에 복종하는 것을 연습하기 때문입니다(Palmer, 1993, pp. 117-125).
이처럼 가르치는 자의 내면이 중요하기 때문에 팔머는 교사의 내면을 위한 교사훈련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의 교사훈련 프로그램에서는 어떤 기교나 기술을 교사들에게 가르쳐 주고 개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자신의 내면을 개발하여 교사의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합니다. 고독과 침묵, 명상적인 독서, 숲을 거니는 것, 일기를 쓰는 것, 들어줄 친구를 찾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Sparks, 2003). 그렇기 때문에 팔머의 교사훈련프로그램에서는 교육방법이나 내용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념을 탐구하고 이런 신념이 가르침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교사의 내적인 탐구가 그들이 가르치는 것의 기초가 되게 합니다. 팔머의 교육사상은 일반교육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으나 기독교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기독교교육에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특히 교사의 내면을 위해 훈련시키는 것은 신앙과 학문의 통합과 인성교육을 지향하는 기독교학교나 기독교대학의 교수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입니다. 특히 영성훈련은 기독교대학의 교수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3. 진리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truth)
팔머는 퀘이커의 생활과 학습공동체인 펜들힐에서 11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퀘이커교도들이 외부적으로는 비폭력으로 사회변화를 추구하면서 내적인 생활에 몰입하는 자신들의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펜들힐은 대학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습니다. 예를 들면, 부엌에서 일하든, 정원에서 일하든, 가게에서 일하든,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든 똑같은 임금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계층구조로 되어 있는 대학과는 달리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을 통해 팔머는 많은 감동을 받았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가 펜들힐을 떠난 후 많은 형태의 공동체에 접했습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연결하는 능력을 개발하도록 돕는 학교와 교회와 같은 기관이었습니다.
팔머는 현대 사회에 공동체 의식이 희박해지는 것은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에 대한 의식이 감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자아는 관계성을 가지고 있고 자기 의식은 공동체로부터 나옵니다. 개인주의자들은 산꼭대기까지 홀로 올라가 그들이 떠나온 공동체를 경멸합니다. 그들은 격리되고 허무감을 느낍니다. 그들은 뿌리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즉 다른 사람의 자원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도 사명도 소명도 없습니다(Palmer, p. 328).
그러면 팔머가 말하는 공동체는 구체적으로 어떤 공동체일까요? 공동체에는 시민공동체, 친밀공동체 등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팔머가 추구하는 것은 교육공동체로 “진리의 공동체”입니다(Palmer, 1998, p. 104). 진리의 공동체를 이해하기 위해 다른 두 공동체를 먼저 살펴봅시다.
교육에서 공동체하면 흔히 “심리치료의 공동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리치료의 공동체는 심리적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기 위해서는 개방적이고 서로 관계를 가집니다. 이런 경우는 공동체가 친밀한 공동체입니다. 물론 친밀감도 좋은 것이고 관계는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동체가 교육의 목표에 가장 적합한 공동체는 아닙니다. 알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어떤 형태로든 친밀한 것을 요구하지만 만일 친밀한 것이 궁극적인 것이 된다면 교육은 왜곡될 것입니다. 친밀감에 근거한 공동체는 우리에게 낯선 사람들이나 낯선 생각에 상호작용하는 능력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Palmer, 1993, p. Xii).
팔머는 시민공동체(civic community)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시민공동체는 친밀감으로 결속된 공동체는 아닙니다. 시민공동체는 잘 알지 못하는 낯선사람이 관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기 위해 서로 결속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공동체의 목표는 타협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 내의 규칙은 인내와 예의바름입니다. 이런 공동체 역시 교육의 목표에 가장 적합한 공동체는 아닙니다. 알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예의바름을 요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면 교육은 왜곡될 것입니다(Palmer, 1993, p. Xiii).
이런 친밀 공동체나 시민 공동체 대신에 팔머는 진리의 공동체를 제안합니다. 진리의 공동체는 흔히 대학의 캠퍼스에서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의 중요한 사명은 지식의 생성과 전파이므로 진리의 공동체는 학문적 세계의 발견과 호기심, 질문과 관계가 있습니다. 또 열정과 훈련으로 사물이나 문제에 대해 대화합니다(Palmer, 1998, p. 104). 이 공동체는 개인을 넘어 팔머가 말하는 학습의 핵심 주제인 “위대한 것”까지 확장됩니다. 이 공동체에서는 서로 경청하고, 갈등이 그들의 관계를 파괴함 없이 서로의 차이점을 어떻게 용납하는가를 배워야 하며 서로 일치하는 훈련과 기술을 배워야만 합니다. 또 교수들의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는 학생들을 소외시키지 말고 학문적인 공동체로 자신들의 동료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팔머는 이 진리가 공동체 속에서 가장 잘 발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퀘이커교도의 투명위원회(clearness committee)의 과정에 대해 말합니다. 즉 경청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통하여 전체가 합의하는 과정입니다. 합의는 다수가 투표하여 진리를 결정하는 의견의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질문의 과정이고 진리가 경청과 반응을 통해 발현합니다. 합의를 통해 개인의 진리가 확인되고 수정됩니다(Palmer, 1993, p. 97).
그외에도 진리의 공동체에는 두 가지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배움 그 자체에 대한 사랑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 지식을 얻는 작업에서 느끼는 온전한 기쁨입니다. 또 하나는 공동체가 배우는 자들에 베푸는 사랑입니다. 특히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자들에게 가르치는 자가 베푸는 사랑입니다(Palmer, 1987). 결국 진리의 공동체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여 진리를 찾는 일을 함께 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 글은 학술지 '기독교교육정보' 에 게재된 필자의 논문 '파커 팔머의 교육사상에 대한 고찰' 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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